출산의 밤 2편이다.
[1편 요약] 풀타임 근무 후 프렌치 레스토랑에서 거한 마지막 만찬을 한 나와 남편. 그날 저녁 갑작스럽게 진통 비스무리한 걸 느끼는데... 이건 가진통일거야, 가진통일거야 현실 부정하다가 급속하게 진행된 진통에 까무라치고 만다. 뒤늦게 새벽녘 도착한 병원, 첫 내진에서 무려 6cm가 이미 열려있다는 소식을 접하며 급히 분만실로 옮겨진다... 무통을 외치며 급 무통분만 주사를 맞은 본인...! 출산의 밤이 깊어간다.
1편에서 빼먹은 내용이 있다면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닥터 캐리에게 말했던 나의 가족력이다. 사실 우리 집 여자들은 (특히 나와 체형 체질이 매우 유사한 우리 엄마는) 분만 진행이 빠르기로 유명한데, 얼마나 빠르냐 하면 글쓴이 본인은 (둘째임), 엄마가 진통이 시작되고 병원에 갔다가 너무 빠르게 진행이 되는 바람에 양수를 터뜨릴 겨를도 없이 양막에 쌓인 채로 나왔다는 사실. 내가 세상에 나올 당시 엄마가 들었던 수녀님의 (가톨릭계 병원이라 간호사분들이 수녀님이셨다) 다급한 외침은 바로, "아니 엄마, 그래도 소독은 하고 나와야지!" 였고, 소독 직후 박혁거세 마냥 양막에 쌓여 나온 게 나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대략 팔십만분의 1의 확률이라나 뭐라나. 나는 양막에 쌓여 나온 탓에 출산 직후 들리는 울음 소리도 없었다고 한다. 수녀님들이 양막을 손으로 찢어서 애를 꺼내야 했으니 말이다. 여하튼 엄마는 그래서 내가 임신 한 뒤 늘, 너는 진통을 느끼자마자 병원에 가야 한다라고 신신당부하셨으나 엄마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뒤늦게 병원에 당도하고 만 게 또 나다. 여기에서 역시 배움은 가르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직접 부딪혀 깨달아야 한다...는 헤르만헤세 싯다르타의 주제가 생각난다나 뭐래나. ("진리는 가르쳐질 수 없다" 라고 했었지 ㅋㅋ)
내가 분만을 하던 밤은 음력 시월의 보름, 보름달이 환한 밤이었다. 미국 산부인과 분만실에는 보름달이 뜨면 분만이 많다는 속설이 있다고 한다. 그날도 여덟 개인가 하는 병원 분만실이 모두 출산 중인 산모들로 가득차 있었다. 들어오는 간호사/스태프들마다 오늘은 왜 이렇게 바쁜지 몰라, 출근 길에 보름달이 뜨더라니... 하며 한 마디씩을 흘렸다. 무통분만이 들면서 차분해진 나는 보름달 속설에 대해 간호사에게 묻기도 하고 남편과 조금 달뜬 상태로 이얘기 저얘길하며 임박한 분만에 대한 긴장과 흥분을 눌렀다. 얼마 후 산부인과 레지던트가 들어와서 다시 한 번 내진을 하고는 분만을 촉진하기 위해 양수를 터뜨리자고 했다. 양수가 터지지 않으면 자궁 경부가 더이상 열리지 않을 수도 있다는 설명도! 소변 보는 느낌이 들 거라고 했지만 무통 효과 탓에 감각이 떨어진 탓인지 살짝 뜨거운 느낌만 들었다. 그 레지던트도, 닥터 캐리한테 들었다며, 너네 가족이 진행이 빠르다며? 조금 이따가 와서 한 번 더 내진해볼게 하고 떠났다. 그 사이 닥터 캐리가 한 번 더 들러서 진통이 올 때 간호사샘과 푸쉬 연습을 심심풀이로(?) 시작해보는 건 어떠냐고, 본격적으로 하기 전에 한 번 해보라고 하고 갔다. 무통 분만주사를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진통이 밀려오는 감각은 미세하게 있었고 그때마다 한 번에 숨을 들이쉬고 멈춘 채로 10초씩을 세며 푸쉬하는 걸 총 3 세트씩 하는 분만 푸쉬 연습을 했다. 제대로 하나? 싶었는데 내 담당 간호사 사라가 너무 잘하고 있다고 완벽한(?) 푸쉬였다고 너무 칭찬을 해줘서 뿌듯하고 신이 났다 하하하. 출산 전 주에 태림법을 본 것 (유튭에 검색해보면 된다 ㅋㅋ) & 다년간의 필라테스로 익숙해진 코어 근육 쓰기의 빛이 발하는 순간이었다! 정확한 시간 순서는 기억나지 않지만 어느 시점에 닥터 캐리가 연습 잘 하고 있냐며 들어왔고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으니 내진은 조금 이따할까 하시다가 아 그냥 너네 가족 진행 빠르다고 했으니 지금 한 번 해보자... 하며 내진을 하셨다! (그때가 병원 온지 한시간 반에서 두시간쯤 지난 시점...) 결과는 십센치! ㅋㅋ 닥터캐리가 몹시 놀라며 너네 엄마 말이 맞다... 너 정말 진행 빠르구나! 하며 지금 내진해보기 잘했다. 계속 하던 대로 푸쉬를 해보렴~ 곧 올게 하고 떠나셨다. 그때 싱글벙글 웃으며 "I'm not exhausted at all"했던 기억. (이 말이 나중에 있었던 위기?에서 간호사 사라가 얘 아까는 이렇게 말할 만큼 괜찮았다구요!! 하는 근거가 되었었지...) 참, 이렇게 과정과정 닥터 캐리가 내가 공유한 가족히스토리를 흘려 넘기지 않고 주의깊게 듣고 신경 써준 게 고마웠다. 안 그랬음 자궁경부가 금새 다 열렸는 데도 모를 뻔 했다.
그!런!데! 두둥...
평온히 남편이 빨대 꼽아준 사과즙 쪽쪽 빨아먹으며 분만 푸쉬 연습 혹은 대충 실전(?)을 하던 중 갑자기 아랫배 방광 살짝 위쪽에 아주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진통이 오는 감각의 일부인 것 같았다. 역시나 통증을 잘 참는 나는 몇번은 그냥 어 다시 또 아프네... 그냥 참아야지 하고 통증을 참아 넘겼었는데 어느 순간 그 통증이 드라마틱하게 강해져서 온 몸을 웅크리고 뒤틀기에 이르렀다. 으아아아아악! 그때쯤에는 간호사쌤이 보고서는 어 너 무통 효과가 줄어드는 것 같아 마취과 불러줄까 라고 했을 지경. 아아니 진통 말기 자궁 경부 다 열린 상태의 진통은 이렇게 아픈 건가요! 벌써 기억이 희미해졌지만 당시 언어화했던 표현이 기억나는데, 누군가 칼로 아랫배를 찔러 후벼파는 느낌이었다... 고나 할까. 무통 한 번 맞았는데도 이렇다니, 충격과 공포의 날카로운 통증에 정신이 혼미해지다가 무통 주사에 내가 너무 아프면 추가로 누를 수 있는 볼러스 (bolus) 버튼이 있다는 걸 알게 돼서 볼러스 두방을 연달아 쐈다. 그런데도 너무 아파서 결국 마취과를 불렀고 마취과 샘이 마취약을 좀 더 맞고 자세를 살짝 옆으로 틀어 통증 부위에 약이 퍼지도록 조취해주셨다. 다행히 얼마 안 있어 무통이 더 들었지만 원래 감각이 적절했던 다리나 회음부쪽 감각은 더욱 둔해져서 이제 아예 진통오는 감각이나 힘주는 감각을 느끼기가 어려워졌다. 그래도 사라의 가이드 하에 필요할 때 푸쉬푸쉬를 계속.
다시 통증이 가시고 평온히 푸쉬푸쉬하던 와중에 사라가 와우 애가 점점 내려온다, 머리를 봤어 했다. 남편과 나는 그 말을 듣고 급두근. 남편도 사라에게 물어 머리를 보고야 말았다. 어어어.. 정말 머리가 보여, 하고 있었고 나는 푸쉬 와중에 우왕 머릿숱 많아? 어때? 와 같은 시덥잖은 걸 묻고 있었다. 사라가 (파이널 푸쉬를 돕기 위해 진통과정을 볼 수 있는) 거울을 가져다 줄까라고 물어서 그래달라고 했고 나는 급... 딱 한 쌍 가져온 원데이 콘택트 렌즈를ㅋㅋㅋ 파우치에서 꺼내서 꼈다. 1편에서 보듯 정신없이 진통을 느껴 병원에 왔던 까닭에 안경을 깜빡했었는데 출산 가방에 무슨 생각이었던지 렌즈를 한쌍 넣었던 게 기억이 났다. 그때 웬일인지 렌즈를 챙기고 싶더라니... 이렇게 파이널 푸쉬와 아기의 탄생 순간을 목도하는 때에 유용하게 쓸 줄이야... 여하튼, 분만의 마지막 과정을 기술하자면 닥터 캐리가 직접 와서 애를 받아줄 준비를 하고 있었고 방은 어두웠으며 나는 아주 조용하고 평온하게 마지막 푸쉬를 하고 있었다. 조명은 사라가, 어둡게 유지할래? 라고 해서 그냥 그러자고 했다. 별다른 선호는 없었지만 내가 원하는 대로 마음대로 하라고 해줘서 좋았다. 회음부 쪽 핀 조명 말고는 아주 깜깜하고 잠잠한 상태. 지나고 보면 어질하게 쨍한 병원 조명이 아니라 그 낮게 가라앉은 밤의 느낌 속에 아기를 만나서 더 좋았다. 참, 내가 분만한 병원에선 한국 산부인과에서 보던 다리를 위에 들어 거치하는 Lithotomy position 자세를 취하지 않고, 평평한 침대에서 다리를 벌려 바닥에 놓은 채로 분만 및 분만 후 처치까지를 하는 게 인상적이었다. 푸쉬할 때만 남편이 한 다리, 내가 내팔로 혹은 사라가 나머지 한다리를 살짝 들어 당겨주었다가 놓는 방식.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산부인과 자세를 취할 준비가 되어있었지만 ㅋㅋ 막상 안 시키기고 평평한 침대에서 분만하니 매우 인간적이고 배려받는 느낌이 들었다...ㅎㅎ 그렇게 일견 우아하다...라고 까지 느껴졌던 인간적인 분만의 밤이 깊어가는데...
아기의 탄생은 이 다음 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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