럽마셀 럽마셀 하는데 럽마셀이 과연 무엇인가? 하고 질문하게 된다. 누군가 럽마셀의 방식도 각자가 시간을 거쳐 깨달아가는 어떤 자기만의 과정이라고 말했던 것에 공감이 간다. 절대 가르쳐지지 않으리!
럽마셀이란 당연한 말 같지만 생각보다 당연하지 않다. 이 과정이 허황되고(그럴싸하고)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정말 실존적으로 중요한 과정이라는 것, 또 나름의 의식적 노력과 인식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도 이것에 가까워지는 하나의 단계인 것 같다.
음악은 오래간 내가 나를 좋아하는 방식이었다.
아직도 중고등학교 때, 혼자 크게 음악을 듣던 땔 떠올리면 음악을 들으면서 느끼던 그 순간, 감정, 생각, 분위기 그 모든 것이 굉장히 위로가 되는 덩어리로, 진실한 장면으로 남아있다. 예전의 나는 내가 겪는 순간에 대해서조차도 회의가 많았는데(이를 테면, 내가 정말 좋은 건가? 혹은 내가 내면화한 타인의 가치인가? 같은...) 혼자 음악을 들으며 좋아하던 때는 누구에게 자랑할 것도 없고, 주눅들 필요도 없고, 알릴 것도 없고, 숨길 것도 없는, 굉장히 자유로운 순간이라고 본능적으로 느꼈던 것 같다.
자극이 늘어나고, 나도 변하고, 음악이라는 게 전만큼 나를 사로잡는 때는 드물지만...
음악에 사로잡혔던 그 순간들이 내가 굉장히 자유로웠던 기억으로 지금도 위로가 되는 건, 어떤 뿌듯함이 되는 건 분명 일종의 지속되는 럽마셀이다.
음악과 관련한 보다, rough하고 본격적인 시도들을 왜 대학 때 안해보았냐고 지금의 나에게 묻는다면,
아무래도 그때는 지금만큼 나에 대해 그리고 내가 자유롭지 못한 것들, 내가 자유로워져도 괜찮은 것들에 대해 몰라서- 라고 말할 것 같다. 대학 때 난 참 다양한 것들을 많이 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짜 좋아하는 일들에서 조금씩은 타협한, 약간은 비켜간 시도들을 했던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때는 나름 고민의 결과였고, 주어진 환경에서 여러 시도들을 해본 결과 였던 거지만 말이다.
사실 그닥 거창한 시도가 아니어도 됐는데, 작년에 진지하게 글을 썼던 것처럼 좌충우돌(?) 허접한 시도여도 괜찮은데 뭔가 전혀 fancy하지 않은 형태의 작디 작은 시도들, 흔적에 가까운 것들이 역시 힘이된다는 사실을 마음으로 알만큼 편안하지 못했던 이전의 나를 부둥부둥하며 십년 뒤는 조금 다른 기분일까 상상해보며 글을 맺는다.
어른의 삶을 살아내며, 더구나 한국 사회의 빡센 결과주의 문화에 궁극적으로 저항하며 이런 작은 럽마셀의 원칙을 발견하고 유지하는 건 생각보다 굳은 심지가 필요한 일인 것 같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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