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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ary

persona에 대하여

by 무대 2020. 11. 12.

- 넷플릭스 돌리파튼 다큐를 우연히 보았는데 페르소나를 다루는 돌리파튼의 방식?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페르소나를 다루는 개인의 방식에 꼭 정답이랄 것은 없겠지만 (건강한 방식의 범주는 있을지라도) 또한 그녀의 방식은 그녀의 특수한 상황 속에서, 또 평범하지 않은 배짱과 영리함, 그런 그녀의 기질로 가능한 것일지라도 분명 인간 모두에 적용될 수 있는 인사이트를 준다. 

- 자신의 페르소나에 대한 완전한 컨트롤, 적어도 본래의 자신 혹은 보다 사적인 자신이 그 페르소나에 대한 완전한 컨트롤을 가지고 있다는 인식, 그 자신감, (스타가 되고 싶었던) 본인의 선택에 의한 불가피한 결과라는 영리한 지적 결론, 그로 인해 설령 친밀한 관계를 맺더라도 절대 양보하지 않는 사적 자기에 대한 정확한 경계(boundary) + 그것과 연관되어 친밀한 사람에게 혹은 친밀하지 않은 대중에게 자신의 취약함(vulnerability)을 드러내는 방식, 그 방식에 대한 인식(awareness), 완전히 소화된 상태에서 자신의 취약함의 존재를 감정 서랍을 닫은 채 전달하는 담담하고 단호한 태도, 곧, 취약함의 내용과 태도의 명확한 의도된 괴리, 뭉뚱그려 말하자면 이런 것들이 인상 깊었다. 

- 사실 이런 포인트 말고 (페르소나니 뭐니 하는 이슈와 관계 없이) 인상적인 부분이 너무 많았다. (언젠가 메모를...) 그래미에서 정국이가 Jolene들으면서 울었던 것도 기억나고ㅎㅎ 그 공명에 괜히 내가 감동하던 것도 기억나고, 프랑스 친구들과 블루투스 노래방 마이크로 졸린 부르던 것도 생각나고 ㅋㅋ 

여하튼 페르소나에 대한 얘기를 하자면,

겉과 속은 일치할 수 없는데 겉과 속이 일치해야 한다는 강박이 많은 정체성의 위기(identity crisis) 혹은 정신적 의미의 개인적 고뇌를 낳는다는 이야기를 몇몇 루트를 통해 접하기도 또 막연히 느끼기도 한다. 결국에는 외려 겉과 속이 당연히 다르다는 것을 편안하게 받아들이고 영리하게 인식하고 있는 (어떤 점이 다른지, 어떤 점을 보이지 않는지 까지) 사람이 이런 이슈에서 성장한 상태의 사람이라는 데에도 동의한다. 

하지만 동시에, 겉과 속이 다른 것이 당연하다, 달라도 된다에 대한 만용은, 혹은 무지에 기반한 무분별한 자기 허용은 경계해야 한다는 생각도 든다. 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고, 상황과 상대에 따라 달라지는 게 외려 현명한 그 페르소나들 가운데, 어떤 상황에서도 궁극적으로 양보하지 말아야할 개인의 가치에 대해서 최소한 이지적 인식을 하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이를 테면 나는 무대 위에서의 돌리파튼도, 그리고 50년간 어떤 공식적 자리에서도 공개된 적 없는 그녀의 남편 앞에서의 돌리파튼도 그 특유의 매력, 사려깊음, 원칙적인 부분, 자신의 역할에 대한 영리한 인식 같은 데에 있어서는 차이가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페르소나와 자기가 더 편안하게 갈라질 수록, 두 정체성 사이의 공통적 속성이 늘어나고, 간극은 더 좁아지리라 생각한다. 자연스럽게. (다름을 추구하다가 결국엔 수렴하는 아이러니랄까!) 반면 페르소나와 self의 차이에 대해 지나치게 허용적인 사람이라면 혹은 일치에 대한 강박이 지나치게 큰 사람이라면 시간이 지날 수록 그 간극은 겉잡을 수 없이 늘어날지도 모른다. 

물론 애초에 겉과 속이 다른 것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들이라면, 그 둘이 다를 수밖에 없음을 편안하게 받아들이더라도 '다른 겉'으로 폭주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고민하는 사람으로 나의 개인적인 노파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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