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문제는 연민의 표현조차 사치스러워서 글과 말로 뱉기 주저하게 된다. 아픔이 진행되고 있을 때/ 어떻게 진행될지 끝을 알 수 없을 때 혹은 절망적인 끝이 우려될 때/ 사건에서 나보다 더 고통받는 존재가 있을 때 등등...
말과 글이 사건과 독립적으로 어떤 환원된 의미와 감정을 생산하고, 그 환원물이 단편적 위로와 격려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이 거대한 진실에 비해 너무 초라해서 부질없이, 사치스럽게 느껴질 때가 있다. 위로를 구하고 위로 받는 과정은 <내가 사건의 아픔을 관조할 수 있거나 혹은 사건이 종료되었거나(사건의 끝을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거나) 순전히 나에게 속한 종류의 고통일 때에만> 의미있는 것일까? 위로를 구할 마음조차 숨어버리는 어떤 문제가 생애 아주 가끔 있는 걸로 해두자.
수능 언어영역 비문학 지문이 떠오른다(갑자기 이렇게 예전기억들이 불쑥불쑥 떠오를 때가 있다.). 대략, 감각은 절대로 공유될 수 없다는 얘기였다. 사과를 깨물어서 이가 아팠을 때 '아야'라고 하고 다른 사람이 '아프겠다'라고 했다고 하자. 아프겠다고 말한 사람은 결코 이가 아픈 사람의 감각을 직접 느낄 수 없다. 아프겠다고 말한 사람은 이전에 자신이 사과를 깨물었거나 그와 유사한 경험을 가졌거나 둘중 하나이며 이를 통해 타인의 '아픔'을 유추하는 것이다(미디어 등을 통해 학습되는 과정도 결국 유사 감각에 대한 인식의 확장이다.). 그 아픔들은 절대 같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각자의 감각을 표현한다. 아주 물리적 차원의 감각부터 굉장히 형이상학적 차원의 감각 까지 거의 전체에 대하여 소통하길 원한다. 물리적 아픔에 공감하는 것과 완전히 같은 과정인데도, 공유하는 감각이 형이상학적이고 특수한 차원으로 올라설 수록 소통은 삐걱댄다. 어떤 감각은 사과를 깨무는 물리적 차원만큼 보편적인 경험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상의 소소한 공감을 할 때에도 늘 있었던 공감 프로세스의 태생적 한계를, 그제서야 느끼는 것이겠다. 그래서 아픔은 사명이라 하였다. 유사한 아픔의 경험이 있는 사람이어야 다른 이의 어떤 아픔을 사과를 깨무는 감각처럼 (전혀 같지는 않지만) 비슷하게 느낄 수 있겠다. 내가 찾은 유일한 긍정적인 핀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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