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맑은 수요일 오후
어느 맑은 수요일 오후
서울은 참 바쁜 도시다. 나에게는 고향이 두 곳 있는데 하나는 서울이고 하나는 내가 태어나 열아홉해를 보낸 곳이다. 그곳의 일상은 참으로 단조로웠고 그 시절엔 스마트폰이 없어서 나는 비록 인터넷을 많이 하긴 했으나 많은 시간 사색을 하였고, 많은 시간 음악을 들었고, 라디오를 들었고, 가끔은 그림을 그렸고, 꽤나 자주 (특히 초등 고학년, 중학교 때 방학 때면) 만화방에 갔다. 드라마나 영화도 봤다. 많이. 고등학교 때 영화는 나에게 (당시 인식하진 못했지만) 다른 차원을 보여주었던 창구였다.
나는 '사는' 곳에 참 정을 붙이는 편이다. 산다는 게 뭔지 특별한 기준은 없지만 보통 관광객 이외의 다른 정체성이 있는 상태로의 머무름이 아닐까 싶다. 런던에서의 삶은 바빴지만 단순하였고 풍성하였다. 나는 Tate Britain을 참 좋아했어서, 짧은 런던 생활동안 Tate Britain에 세번 정도 갔다. Tate Britain은 참으로 안락하다. 딱 적당한 규모의, 참 좋은 작품들. 언제나 마음에 울림을 주었다. 평일에 가서인지 늘 아주 적당히 조용했다. 그 때는 이렇게 많은 할일이 없기도 했거니와, 거주자와 방문객의 중간 자로서 힘을 내어 부지런히 돌아다녔다.
오늘은 하루를 일찍 마친 날이다. 영국에서 처럼 힘을 내어 서울을 보기로 마음먹었다. 할일에 압도되고 마음이 급하면 결국 아무것도 못하고 수동적 도피로 인터넷만(아이쇼핑, 유투브, 네이버 삼총사) 하다가 하루를 마칠 때가 많다. 또 오늘은 날씨가 너무 좋았다.
서울은 정말이지 너무 바빠서 고속터미널에서 광화문에 간다는 건 정말이지 큰 마음 먹음을 요한다. 갤러리에 가고 싶어서 우선 3호선에 올랐고, 안국역에 무작정 내렸다. 국립현대미술관을 찾아가는 동안에 쭉 늘어선 화랑/갤러리들을 보게 되었다. 대부분 작은 무료 전시들이다. 나는 현대화랑에서 황영성 작가의 소의 침묵이란 전시를 보게 되었는데.
생각보다 무척 좋았다. 서울에서만 볼 수 있는 전시였고 한국 작가에게서만 느낄 수 있는! 이건 생각보다 정말 중요하다. 외국에 짧게 나마 다녀온지 얼마 안돼서 인지 '한국적인 것'의 특수성이 더 크게 다가온다. 얼마나 신기한가. 어떤 문화적 맥락을 공유한다는 것이... 문화권의 힘이 그렇다. 한국은 더구나 매우 특수하고 강한 문화적 맥락을 가지고 있다.
그림은 아주 독창적이진 않을 지 언정 아주 진실하고 아름다웠다. 역시 울림을 주었다. 다소간 Tate Britain의 한 방에 와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작가님은 마침 한 interviewer와 인터뷰를 하는 중이었다. 소의 '침묵'이 어떤 의미인 지 궁금해 하던 차에 인터뷰를 엿들은 것도 좋았다. 서양인이 '소'를 대하는 맥락(=스테이크ㅋㅋ)과 한국인 특히 옛 세대가 '소'를 대하는 맥락(=희생, 헌신, 고마움, 친구, 가족 등등)은 정말이지 다르다고 하였다. 나도 어릴 적 할머니댁 이웃집 소를 기억한다. 그래서 소의 옛 맥락이 어렵지 않다. 소의 '침묵'이 뭔가 부정적인 의미가 아닐까 생각했는데, 작가 인터뷰를 엿들으니, '침묵'은 그에게 아름다운 희생을 의미하는 거였다.
또 80세가 넘었다는 작가님은 화가라면 끊임 없이 새로운 소재를 시도해야 한다고 말했다. 작가에 대해 1도 아는 것 없이 그 문장을 엿들은 게 다지만, 80대의 화가가 새로운 시도에 대해 언급하는 것 자체가 아름답지 않나? 사실 나이가 들면 (나는 땅꼬마에 불과하지만 나조차도) 새로운 시도가 점차 버겁다. 그리고 검은 색에 대하여 '검은 색은 모든 색을 다 포함하는 거잖아요'라고 말한 것을 (역시) 엿들은 것도 신선했다. 침묵과 검은색 그 다소 무거운 조합이 꽤 다르게 재해석 되었다.
날씨 좋은 날 굳이 현대미술관에 안 가더라도, 안국역 to 현대미술관까지의 갤러리 투어를 하는 것도 재밌는 서울 나들이가 아닌가 싶다. 그럼 이만!
p.s. 오늘의 일기는 런던 Tate Britain 방문기이기도 한 걸로. 나는 정말 그곳을 좋아했다. ㅎㅎㅎ 많이들 가는 Tate Modern 보다 훨씬... 갤러리는 National Portrait Gallery, National Gallery, Tate Modern, Tate Britain 4 곳에 갔던 것 같다. National Gallery는 언제나 무척 붐비지만 워낙 클래식한 좋은 작품들이 많아서 좋았고 Portrait Gallery는 아주 짧게 본 게 다지만 초상 속 사람들의 삶을 상상하는 게 재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