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너의 이름은

무대 2017. 1. 27. 01:47

시공간의 차원. 삶과 죽음. 우주. 나를 압도하는 주제들. 현실과 상상의 경계. 내삶의 균형점. 상상 속에 있을 때의 행복. 위태로움. 망상의 긍정. 언어의 궁핍함. 

황혼의 기적. 아름다움. 그리고 거대한 쓸쓸함. 신비. 그속의 사소함. 사랑. 연결됨. 결국은 현실과 상상의 경계. 나의 의미. 세계관과 자유.




애써서 열심히 언어화 하기


<너의 이름은> 같은(=무엇이 그같은 콘텐츠의 공통된 핵심인지는 정확히 집어낼 수 없으나) 영화를 보면 나같은 경우엔 한동안 멍하다. 3차원 좌표로 표시하지 못할 어떤 공간을 잠시 표류하는 것 같다. 눈앞에 보이는 배경은 구름, 내가 아는 밤하늘, 우주, '파란 색' 같은 것. 그런 곳으로 무지무지 가고 싶어진다. 갈 방법이 있다면 당장 넘어갔을 거다. 현실과 상상의 경계, 3차원과 그 이상 차원의 간극이 일순간에 희끄무레해지며 그래 그곳에 갈 수 있을지도 몰라! 한다. 무의식 저너머 어떤 깊고 거대한 바람(욕망)이 나를 넘본다. 이 순간은 여러가지 감정으로 설명될 수 있겠지만 우선 이야기의 결말이 해피엔딩이라는 전제하에(그래야 나를 압도하는 다른 감정이 없을테니) 단순히 말해 '행복하다'. 그래, 아슬아슬 행복하다, 그게 나의 고민이다.

대개의 경우 나는 두발을 딛고 선 나의 현실에 아주 깊이, 기꺼이 뿌리내리고 있다. 예컨대 내 직업(내가 앞으로 할 직업)이 그러하다. 현실의 아주 구체적인 지표들과 단서들에 섬세하고 영민하게 깨어있어야 한다. 나의 일부는 분명 그런 것에 능하다. 그리고 심지어 종종 재미도 있다. 그러나 고백하건대 나의 일부는 아주 오래전부터 쉬이 정의하기 어려운 '예술적' 삶을, 예술가가 되기를 꿈꿔왔다. 음악을 사랑해서? 그림을 보는 감동? 글쎄, 나의 아쉬움을 조금 더했을지언정 마음 깊숙한 곳에서 올라오는 이 추동의 근원이라고 말하기엔 조금 부족하다. 그리고 예술적(?) 삶에 대한 동경은 분명 어떤 구체적인 미련이 아니다. 궁핍한 언어로 표현하자면 일종의 자기표현, 경계없음, 시공간의 차원에 구속받지 않음, 물리적 차원을 벗어남-그 결과 연결됨-에 대한 추동, 갈망의 에너지이다. (흔히 '현실'과 '이상'을 구분할 때 '현실'이란 단어가 등장한다. 그러나 지금 이 글에서 '현실'은 좋게 말해 '몽상'ㅡ격하게 말해 '망상'과 대비되는 언어이다. 이런 범주하에서는 현실과 이상의 '이상'조차 '현실'에 속한다.)

빡빡하지만 현실에 뿌리내리며 살고 있던 나는 가끔 이런 콘텐츠를 만나 어퍼컷을 한번 맞으면(보통 약한 포인트가 시공간 부수기, 죽음이다. 사실 무지 무섭기도 하다. 혼자 못봄) 뭐지, 나 지금 어디있지? 하며 내 존재의 위치를 질문한다. 이 추동은 때로 나의 두발이 딛고 있는 세상을 함께 벗어낼 신발인 양 무시한다. 이번엔 현실에 뿌리내린 두 발이 뽑혀나오며 두둥실하였던 그 행복감이 문제였다. 나는 앞으로의 삶에서 내가 현실과 몽상의 경계 어디쯤 있어야할지에 대한 '현실적인 고민'을 했다. 좁은 의미로는 직업에 대해 고민했다. 일단 의사가 되겠지. 그 또한 천차만별이겠지마는 많은 삶의 방식-배움과 직면-을 함축한 그 테두리가 싫지 않다. 몽상을 담아내는 게 나름의 과제겠다. 좀더 넓은 의미로는 나는 나의 추동, 나의 세계관, 나의 욕구에 대해 생각했다. 거기에 대해서는 기회가 되면 더 적겠다. 

p.s. 딴소리, <인터스텔라>를 볼 때는 무섭고 싫기만 했다. <너의 이름은>에는 현실을 저만치서 바라보게 만드는 아름다움이 있다.